갑신정변은 애초부터 성공 못할 거 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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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개화를 비교적 성공률이 높은 시도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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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이라는건 자본이 있어야 됩니다.
예를들어 우리나라 군부독재시절에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손을 많이 벌렸죠.

이런 관점에서 당시의 조선을 봅시다.
도대체 무슨 자본으로 개화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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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포르투갈이 먼저 열고 (왜 하필이면 일본만? 옆에 한국은 제껴두고) 그 다음에 미국이 강제로 열어서 운이 좋았는데 한국도 누군가 강제로 열었으면 됐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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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먼저 열었다고 개화가 되는게 아닙니다.
일본보다 먼저 열린 나라들은 그럼 왜 일본만큼 개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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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갑신정변이 왜 실패 했을까? 와 함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성공 할 수 있었을까? 를 함께 고민 해 봐야 할것 같습니다.
메이지 유신 전 까지만 해도 수백년 동안 실권은 쇼군에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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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페리가 개항을 요구해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 근대화에 있어서 '페리 제독의 강압적 무력시위 및 개항 확대 강요'는 강력한 외국의 압력이며 점진적인 개항을 하려는 막부 정권의 치명타를 가져왔지만 치명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주역들은 막부가 '굴욕적으로 개항'하여 분개한 불만 분자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막부 정권 입장에선 전통적으로 오랜 세월 반골 기질을 가진 '사츠마' '죠슈' 등 웅번의 젊은 신진/급진 우익 인사들이 우여 곡절 끝에 일왕과 그 주변의 전통적 조정 문신들을 편으로 끌어 오면서 '토막'의 명분을 결정적으로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막부 그 중에서도 쇼군의 잦은 교체와 무능 그리고 결정적인 전투 중에 쇼군의 급사(병사)가 결정타였고 이렇게 되어 메이지 유신도 큰 유혈 사태없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패번치현', '패도령' 등이 내려지면서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치안을 담당하므로 전통적인 번정과 무사 계급을 중심으로 하던 일본식 중세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축으로 내란은 일어 납니다만 중앙군에 의해서 어렵사리 진압되고 마무리됩니다.

즉, 사실상 메이지 유신은 (막부 정권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성공한 반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지 유신은 '(미국의) 굴욕적인 개항에 반대'가 큰 명분이었지만 정권을 잡은 메이지 유신 핵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라를 열고 받아 들입니다. 즉, '개항 반대' 명분은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의 핑계 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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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하급무사들이 수구세력이던 막부를 붕괴시킨후
수구세력의 붕괴후 이렇다할 새로운 개혁 정부 수립없이
거의 30년 세월을 일본은 무정부상태로 방치하다 시피하며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섬나라 이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반면 한국도 수구세력이던 왕실관료들을 붕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히 주변국의 간섭이 이뤄져 그게 쉽지 않았죠,
더군다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처럼 30년에 걸친 장기간 혼란기를 거치기도 힘듭니다
한국은 그 수구세력이 붕괴되고 개혁세력이 들어서려는 혼란기에
바로 일본이 들어와 버린 케이스죠

개혁이란 자본이고 나발이고
근대적 대학의 설립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일본도 근대적 대학이 설립된후 정확히 30년, 정확한 1세대죠
30년 흐른후 그들이 사회 지도층에 자리잡은후
개혁이 시작됩니다.

개혁의 시발점은 근대적 대학설립니다.
초딩 중딩 설립이 절때 아닙니다.
종합 대학교의 설립이 근대화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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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일본은 100% 섬나라의 지리적 행운 때문임,
일본은 막부 수구세력 붕괴후 30년의 무정부 상태 혼돈기를 보낼때 아무도 침략하지 않았음

한국은 주변 강대국을 가진 지리적 불행임,
수구세력이 붕괴될 시점에 번번히 주변국이 간섭하고,
수구세력이 붕괴될 시점의 혼란기에 바로 일본이 침략해 버린 케이스임. 지리적 불운임

또한 일본은 게이오 대학이 들어선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러 개화가 시작되기 시작함.
그 일본 개화의 주역이 다 게이오 출신들이라는게 증명함

반면 한국은 종합대학의 설립을 일본이 다 틀어 막았음.
서울대는 일본인들을 위한 대학이었을뿐, 그외에 다른 대학교는 없었음 일본놈들은 한국에 종합대학 설립을 금지시켰던 놈임.

한국도 해방후 대학교가 마구 생기고,
그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한후 고성장 하기 시작하는 것임.
여러 제도고 공학이고 뭘 배워야 경제를 돌리지.

참고로 우리아버지 서울대 졸업하고 나이 30에 대기업 과장 40에 이사 이렇게 막 승진임.
왜 그렇게 젋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 했냐 하니 아버지 전세대는 대학 출신이 없다네요.
해방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정규교육도 못받고 인생 비참하게 살다 죽은 것임. 일본놈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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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란것도 천황제라는 군국주의로 빠져
근대적 정부의 형태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전근대적 신정체제+왕권이라는 광신도 정권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맥아더의 핵 한방 맞게 되고,
결국 일본은 맥아더에 비로소 의회민주주의 입헌군주제를 구경하게 되고, 비로소 진정한 근대화가 됩니다.
어찌보면 일본은 핵미사일에 감사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근대화를 가져다 준게 핵입니다.
핵미사일 없었다면 영원히 의회민주주의 입헌군주제는 생각도 못할 원숭이 집단이죠.
하지만 그것도 자민련이 집권하는 사실상 1당 장기집권을 하다보니
저게 민주주의 국가 맞냐 라는 생각이 들죠.

반면 한국은 해방후 의회민주주의 체제가 아주 제대로 들어섭니다.
운영이 개판이지 제헌 헌법은 일본 제국주의헌법과는 게임도 안되게 가장 근대화된 민주주의 헌법입니다.
또 대학교도 설립되기 시작해 70년대 들어 그들이 사회에 나와 본격적 개발 드라이브를 탑니다.
상당히 압축성장을 하죠.
또 일본 군사독재 교육을 친일파 영향으로 긴 군사독재 세월을 거치지만.
일본과는 다르게 국민이 그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양당제를 정립시킵니다.
일본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그 속도 질을 보자면 일본과는 비교도 안되게 대단히 빠른 한국입니다.

통일만 된다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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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은 해방후 의회-민주주의 체제가 아주 제대로 들어섭니다.'

위 내용이 일부 맞으나 일부 어폐가 있는 것이 교과서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해방 당시 '미군이 진주하고 패전국 군인 및 군속보다 한국인을 더 적대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미군은 일본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나 한국과 한국민을 이해하는 군인 및 군속이 전무하였기에 친일 세력을 척결하지 못하게 했으며, 오히려 친일 세력을 보호하고 중요 직책을 맡겼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는 것이 '정의'라고 볼 순 없습니다. 이렇게 처음 부터 단추가 잘 못끼워 졌기때문에 친일 및 친미 세력은 결탁하였고 (결과론적으로 이제 와서 보자면) 일신의 영달만 꾀하는 족속들이라 북한의 군사력을 과소평가 하여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호전적인 발언을 서습치 않아 미국의 무장 지원을 받지 못였으며 그리하여 6.25 동란이 발생합니다. 이후 4.19 혁명과 군사독제의 폐악 극복(광주 민주화, 6.10 민주화 투쟁 등)을 위해서 수많은 민중의 피와 땀을 짜냈으며 이렇게 어렵게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결정적으로 분단된 민족입니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그들만의 독특함이 있지만 분단되진 않았기에 우리가 놀랍도록 '빠르게' 발전했다에 만족하면 안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