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할머니 이야기

jeongheumjo의 이미지

오늘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역에 있는 영풍문고에서 책을 하나 샀습니다. 'ACE 프로그래머 가이드'
그리고는 서점 옆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세트메뉴를 주문해서 자리를 잡고 먹고 있었지요.

제 앞 테이블에서 한 청년이 어떤 할머니와 아주 서글서글한 미소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치가 보니 청년은 바쁜 듯 보였고 할머니는 청년에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듯 싶었습니다. 청년은 간신히 약속한 친구가 기다린다며 자리를 피해 예의바른 모습으로 할머니를 떠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저를 힐끔 보시더니 천천히 제쪽으로 뒤돌아 앉으셨습니다.
저는 조금 경계했지요. 워낙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보이니까요.

할머니는 말상대가 필요한 듯 보였습니다. 구걸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셨구요.
저는 햄버거를 다 먹는 동안만 할머니 얘기 들어드리는 것은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햄버거를 다 먹었을 때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각자 갈길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서점으로 저는 지하철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시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할머니는 입술이 조금 부르트셨지만 얼굴이 아주 고으셨습니다. 고생이란걸 모르고 귀하게 대접받으시면서 사셨던 것 같아요. 연세가 85세라고 하시더군요. 저희 할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비슷하셨을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도 맥도널드 콜라를 드시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할머니는 요즘 젊은 여자들이 아주 보기가 좋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보고 여자를 골라야 하지 않는냐... 제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여자얘기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러자 할머니 얘기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책보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세계명작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었다고 하시면서 괴테와 톨스토이 얘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할머니께 책을 읽지만 마시고 글을 써보시는건 어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별 생각없이 툭 던진 말이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자신이 작가시라는 것입니다. 시를 쓰신다고요. 등단을 했었다고 하시면서 메모지들을 보여주시더군요. 메모지에 시를 쓰시는 것 같아요.

이렇다 할 일은
 
 
이렇다 할 일은 없었지만
그 날은 기분 좋은 날이었기에
메모지에 적어서 날짜를 써넣고
벽에다 붙여놓지는 않았다.
 
조용히 날려 보냈다.
 
한 번 쯤은
망각 속에서 잊혀져 갔다 해도
언젠가는 먼 기억의 뜰안에 피어나서
 
二月의 추운 정류장에 서 있을 때
찻집에서 혼자 차마시고 있을 때
병원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별안간 그 향기 코끝에 찾아와서
마음 어루만져 주는 일도 있을테지

江邊(강변)의 봄
 
 
러시아워가 지난 강변도로
거울같이 고요한 수면에
 
진달래 개나리가 수양버들과
수채화를 그린다.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
누구를 위함일까
 
물안개 하늘한 베일을 치는 강 건너 둑을
분홍색 코드자락 날리면서 걸어가는 여인은
어데로 가는 것일까.
 
오늘은 시외버스를 타고
봄 끝까지 달려 가 보고 싶다.

할머니 성함이 한정명씨십니다.
글쓰는 걸 일부러 얘기하신 것은 아니었구요.
저는 할머니와의 만남이 짧았지만 기억해야겠다 싶어서 메모지의 시를 카메라로 찍어뒀네요.

할아버지는 의사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우리나라에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셨던 분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얼마전에 돌아가셨다고요... 두분이 아주 사이가 좋으셨던 것 같은데 이제는 혼자계셔서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쓸쓸하셔서 모르는 청년에게 말을 거시는 것인가... 할머니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시더군요. 모르는 청년들한테 말거는 것이요. 무슨 일이 있으신건지..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정말 작가시네요!

잡지 '현대문학'에 글이 올라계시고 한국 시인협회 사이트에서도 할머니 이름과 위의 시가 보입니다.

할머니의 시도 참 이쁜 것 같아요.

저에게는 주소와 전화번호도 적어주셨어요.
제가 할머니 사진하나 찍고싶다고 했더니 사진은 싫다면서 대신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셨어요.
여기 올릴 필요는 없겠지요..

할머니의 건강을 오늘밤에는 빌며 바라며 잠들어야겠습니다.

bus710의 이미지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찌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거리에 나오셨을까요?
괜히 걱정이 되네요.
기왕에 이름과 연락처를 나누셨으니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life is only one time

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와 마음씀씀이가 좋으시네요 ^^
글을 읽는 저까지 기분이 다 좋아지네요

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덕분에 저도 기분좋게 잠을 잘 수 있을거 같습니다.^^;

jachin의 이미지

사람의 만남이란 원한다고 이뤄지지도 않지만,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뤄질 때가 있지요. :)

그 기연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

moonend의 이미지

요즘 사람들은 이어폰에 노래 듣고 나니니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가능성이 없죠.
... 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