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신비주의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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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이니 십덕이니 콩가루 되도록 까이는 취미인 애니메이션 감상. 옛날에는 마이너 정도로만 취급받았는데 어쩌다 이런 오명을 뒤집어 썼는지. 옛날 형님들은 `애니는 유해하다, 애들이나 보는 것이다'의 편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개선되지 못하고 더 악화되어 오덕이니 십덕이니 하니..

90년대 중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즐겨 봤습니다. 당시 히트쳤던 작품들 보면 공통적으로 신비주의가 한 몫을 합니다. 기실 별 내용은 없는데 어려운 말 쓰고, 후까시 좀 잡고, 기이한 전개, 화려한 영상. 대표적인 작품들을 열거하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 소녀혁명 우테나(1997)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지금 보면 `이거 뭐야' 이런 느낌인데 당시에는 저런 매력에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일본애니가 한물간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관심도 없어지고. 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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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덕후(?)들은 자기의 밥벌이는 따로 두거나 아예 덕후의 직업(애니메이터, 기자 등)을 갖고 충분한 실탄을 장전하고 덕후질(?)을 했습니다.
또한 열린 마인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자신이 가진 정보를 알리는 데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보는 다시 고품질 컨텐츠를 만드는 데 피드백이
되는(제작자들 그 자신이었으니까요.) 선순환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의 쓰레기가 아닌 중요한 경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석하고 공유하며 정보의 깊이를 키워왔습니다.
이 점은 오픈 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매우 비슷합니다.(오픈 소스 활동도 일종의 덕후 활동입니다.)

하지만 점차 덕후의 연령이 낮아지고 세카이계 등 극단적인 개인화 사조가 나타나면서 이러한 선순환 흐름이 무너졌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거나 프리터 등 단기직을 전전하며 덕후일을 하니 정신의 건강함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정보의 공유와 피드백 역시 좁은
이너서클(동인 그룹, 동호회)의 안에서 맴돌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을 거쳐 다듬어진 정보가 선순환이 되지 않고 개인화도 심각해져 컨텐츠의
질 역시 꾸준히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정치적인 이유(덕후는 사회 문제의 희생양으로 매우 좋은 존재입니다.)로 덕후를 인간 말종화하려는
시도에 사회적인 평판까지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동인활동의 상업화' 경향도 심해져 더욱 컨텐츠의 선순환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예이기는 하나 우리나라라고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이러한 정보 공유를 하는 사람들의 연령이
낮아졌으며, 경기 침체에 따른 수입의 불안정성 역시 커졌습니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개인화는 매우 심해졌으며 정치적으로 우경화된 청년 실업의
주역들이 21세기의 새로운 덕후들을 구성하고 있는 만큼 일본의 상황은 우리나라 덕후들의 미래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습만 조금 다를
뿐 큰 흐름이 달라지기는 어렵습니다.

오덕과 십덕을 입에 달고 다니며 마이너 문화 마니아의 지위를 바닥으로 내치고 있는 것도, 그리고 그러한 비난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바로 21세기의
덕후들입니다. 스스로의 처지를 스스로 바닥으로 내팽개치는 지금의 오덕(?)을 보면 매저키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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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니메이션에는 신비주의라고 잊어버리기에는 좀 어려운 배경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각기동대 : 처음 봤을때는 충격이었죠.. 저는 학교서 도스에 브라우저 깔아서 놀고 있는데 누군가는 기계몸으로 뛰어다니며 서로를 해킹하는 상상을 하고 반쯤 세상에 내놓은 셈이니까요.
마크로스 플러스 : 꿈이나 의지를 본 것 같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 AT필드는 마음의 벽!!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 한 소녀의 의지였죠..

하여튼 일본 에니메이션의 무서운(?) 점은 화려한 영상이나 음악으로 사람을 현혹하면서 무의식속에 무언가를 각인시킨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A rose is a rose is a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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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이 나 보이는 이면에는 꽤 정치적이고 보수적인 판단이 자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도 한꺼풀 벗기고 이면을 보면 그것이 폼나고 멋진 것이 아닌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고 생각이 없던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크로스 플러스는 마크로스2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과거 취향의 시청자(OVA니 시청자보다는 구매자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만.)의
취향에 맞춰 보수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즉, 영상미와 '음악' 그 자체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 '사나이'와 '비틀린 우정'을 양념으로
더했을 뿐입니다. 철저히 판매량 증대를 목표로 했기에 심오한 뜻보다는 과거 마크로스 시청자들의 취향에 맞춰 중요한 것을 강화했을 뿐입니다.
마크로스 7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마크로스 7은 구 마크로스를 어느 정도 부정하는 것이기에 보수적인 시청자에게는 위험함이 컸습니다.)
시리즈의 안착을 위해 무난함을 고른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와 방향이 다른 시리즈를 만들기 전에 보수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 장치성 작품을 내놓은 것은 이것만은 아닙니다.
건담의 경우 F91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구 건담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핀성 작품으로 0083을 내놓았습니다. 사실 그 안전장치가 성공하고
원래의 것이 실패했다고 봐야 합니다만, 절대 심오한 생각으로 0083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과거 지향적으로 몸을 사려 만든 것 뿐입니다.

에스카플로네 역시 매우 보수적인 관점의 애니메이션입니다. 철저히 당시 유행하는 드라마의 성향을 따랐을 뿐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에스카플로네는
로봇이 나오는 막장 삼각관계 드라마일 뿐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반항아 성향의 몰락한 명문가 남성, 지적이고 완벽하지만 슬픔을 안고 있는
전문직 남성,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주체를 못하는 평범한 여성... 어딘가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의 구성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뉴턴은 나쁜넘이다'라는 살짝 뒤통수를 치는 내용과 뛰어난 메카닉 디자인,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인 칸노 요코의 음악을 넣어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한 보수적인 애니메이션입니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 '제작자의 처음 생각과 전혀 다르게' 덕후의 로봇 애니메이션이 되어버린
에반게리온 앞에 철저히 무너지고, 반대로 에반게리온이 21세기에 재평가를 받으며(비난을 받으며) 다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 본질은 보수적인 드라마에 바탕을 둔 것일 뿐 심오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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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의 이미지

무지 재밋지 않나요. 완전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A%B8%B0%EB%8F%99%EC%A0%84%EA%B8%B0_%EA%B1%B4%EB%8B%B4W

winner의 이미지

제작자가 늘어나고, 제작단가를 줄이면서 일상을 그린 작품들이 대중화에 적합해진 것 아닌지...
양산된 작품들이 하도 많아서 비록 그중에서는 소수이긴 해도 예전과 절대수로 비교해봐도 신비주의 작품의 수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iris의 이미지

왠지 어렵고 폼나는 것이 요즘 덜 보이는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1. 사람들의 피로감
- 1990년대 중반 에반게리온의 말도 안되는 성공은 '형식적'인 모방작들을 오랫동안 찍어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재패니메이션 그 자체가 위기를 맞으면서
에반게리온의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뤄졌으며 그와 함께 에반게리온'식'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감과 혐오감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2. 비용의 문제
- 점차 실패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1쿨(13화) 이상 가는 작품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짧은 시간 한계 안에서 이해를 시키는 데 오래 걸리는 내용은 그리 알맞지 않습니다.

3. 원작의 한계
- 동인지 시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또한 만화 시장의 소비층이 극단적으로 보수화되면서 애니메이션의 뿌리가 되는
메이저 만화계의 수준 역시 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것보다는 가벼운 것이 많이 나오고 있는 만큼 애니메이션 역시
이러한 만화 시장의 트렌드 변화와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추신: 개인적으로 요즘 애니메이션 가운데 18禁 게임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것이 늘고 있는 데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미연시를 원작으로 못할 이유는 없지만, 18禁 게임의 시나리오 수준 역시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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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님 깊이가 있는데요.
90년대 애니를 옹호했던 형님들이 생각나는...

당시 작품은 보지도 않고 음악만 듣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군요.
즉 내용은 없는데 화려한 영상과 좋은 음악으로 승부를 보려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

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덕후, 십덕, 오덕이 뭔가 했더니...
오타쿠 --> 오덕후
0덕후 = 매니아보다 더 광적
줄여서 오덕
오덕 + 오덕 = 십덕

오 나의 여신님 같은 것은 축에도 안들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