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읽어 봅시다...

[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논술 고사를 보는 이유

핸드백을 날치기 당한 아가씨. 행여나 싶어 백 속의 자기 휴대폰으로 전화
를 해봤다. 범인이 받았다. 아가씨는 상냥한 목소리로 데이트 신청을 했
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만나보면 서로 통하는 게 있을 거라는
둥 수다를 떨면서. 범인이 선뜻 응해왔다.

난감하게 된 건 신고를 받은 형사였다. 범인이 정신 나간 사람 아니고야
나올 리가 없지. 하지만 신고를 받은 이상 안나갈 수도 없고. 반신반의하
면서 약속한 다방 옆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핸드백을 들고. 세상에
이럴 수가? 형사 생활 10년에 이런 횡재도 처음이다.

손 하나 까딱 않고 범인을 체포했으니 말이다. 정신과를 찾은 건 그래서
다. 모자라거나 돌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멀쩡한
청년이었다.

도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앞 뒤 상황을 고려하면서 조금
만 생각을 전체적으로 신중히 할 수 있었다면 그가 현장에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이게 요즈음 사람들의 사고 패턴이다. 즉흥적이고 단편적이다. 이것저것
을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

그런 훈련도 안돼 있고 또 그럴 여유도 없다. ○×식 교육, 즉답을 요구하
는 TV퀴즈, 크게 멀리 보는 기본적인 훈련조차 안돼 있다. 대학 논술고사
를 도입해야 했던 딱한 배경도 여기 있다. 폭 넓은 사고, 창의적 교육을
위해서다.

요즈음 신문마다 논술고사 특집을 하고 있다. 고액 전문과외도 등장했다.
한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심하다.

대입준비를 하는 젊은이에게 어쩌면 이렇게 유치한 걸 가르쳐야 할까. 초
등학생 일기 쓰는 훈련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온통 단편적 사고(斷片的 思考) 일색으로
돼가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 안목이 없다.

모든 게 그때그때다. 정치인이 거짓말을 거리낌없이 해댈 수 있는 것도 그
래서다. 오늘은 이말, 내일은 저말을 해도 그걸 다 기억해두었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다.

쉽게 잊어버린다. 삼류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국민들의 단편적 사고
로 인해 그의 행적 전체를 따지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기꾼이 설치는 것도, 사이비 종교가 창궐하는 것도 마찬가지. 쉽게 넘어
간다.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고 논리적.체계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면 그렇
게 쉽게 넘어갈 수가 없다.

똑같은 수법의 금융사기가 먹혀드는 것도, '높은 이자' 라는 그 달콤한 미
끼에만 현혹될 뿐 앞 뒤 상황을 따져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뭐가 하나 된다 하면 우르르 몰려드는 통에 결국 다 망한다. 추석 귀성방
송이 오히려 체증을 부채질하는 것도 그래서다.

국도가 여유있다는 방송과 함께 모두 그리로 몰려든다. 어느 시간대가 한
가하다는 방송만 믿고 가다간 낭패 당하기 일쑤다.

조금만 융통성 있게 생각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전
혀 상반되는 두가지 생각에도 모순을 못 느낀다.

심지어 생각 따로 감정 따로다. '혼자 걸으니 쓸쓸하네요' 라며 노래를 부
르는 저 가수의 표정 좀 보소. 생글생글이다.

백코러스도 박수를 치며 신이 났다. 신이 나기로는 청중도 마찬가지. 이
쯤 되면 정신과 진단기준으로는 정신분열병이다.

실연을 하고 혼자 쓸쓸히 걷는 여자가 미치지 않고야 어찌 이렇게 즐겁고
신이 날 수 있단 말이냐. 거기다 짜라랏짜-하는 후렴까지.

네티즌 용어를 듣노라면 현기증이 난다. 단어마저 쪼개 쓴다. 약어.약자.
신어조작증(新語造作症)까지다(참고로 이건 정신분열병의 중증 증상이
다). 스파이들 암호 같다. 생략.신속.편리 등 디지털 세대의 이런 속성들
이 점점 사고의 단편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귀엽고 깜찍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된다. 종
합적 사고, 깊은 사색 없이는 창의력은 생겨나지 않는다.

국가 발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국지전에 이겨도 대세를 못보면 바둑
을 그르친다. 워낙 좁은 땅덩이라 겨우 본다는 게 등넘어 콩밭인가.

젊은이여, 앞뒤 두루 넓게 전체 숲을 보라. 그리고 우주 전체를 보는 큰
안목을 길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