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월드뮤직, 누에바 깐씨온, 그리고 우리의 음악에 대한 짧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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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뮤직, 누에바 깐씨온, 그리고 우리의 음악에 대한 짧은 단상

2007.4.1 만우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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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뮤직(서남준 지음, 대원사) 257쪽에서

1950년대의 어느날 칠레 북부의 광산 마을을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눈으로 본 광부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녀는 민요의 형태로 노래했다.

팜파를 향해 떠났을 때
나의 마음은 노래하는 새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죽어버렸다
처음엔 날개를 잃었고
마침내 목소리마저 잃어버렸다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불타고 있는데
광부들이 사는 집을 보았을 때
차라리 달팽이 껍질 족이 훨씬
낫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법의 보호 아래
영리한 도둑들이 판을 친다.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불타고 있는데.....

중략

그리고 가는 곳마다 민요의 아름다움과 민속 문화의 풍부함에 놀라면서 사람들의 일상을 배워 나갔다. 그러면서 그들이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것이 마음 아파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가난한 것일까?'라는 소박한 질문을 자신의 언어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그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 눈물과 축제 및 경우에 따라서는 감옥이나 추방에서 겪는 고통을 노래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로큰롤이 난무하던 195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 각지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새로운 노래' 즉 '누에바 깐시온' 운동이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싹튼 뒤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 카리브 해와 라틴 아메리가 전역에 걸쳐 일어났다. 나라와 시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것은 새로운 시점, 새로운 가치관을 담은 가곡이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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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뮤직, 제3세계 음악(현재 상황에서는 이 단어가 맞는지는 모르겠다)에 대해서 마음의 관심만 가지고 있다가 처음 접한 것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비디오를 잘 보지 않는데 어떻게해서 비디오를 빌려보고 음반도 사게 되었다. 낯설은 나라 쿠바, 그리고 그 쿠바에서 일상생활을 하다가 다시 노년의 나이에 음악을 만든 사람들, 그들의 음악이 생각보다 낯설지는 않았다. 어쩌면 음악은 처음이어도 차베스가 이끌고 있는 베네주엘라를 포함하여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남미의 상황때문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국내 주류언론에서는 소개를 잘 하지 않으니 관심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변화를 알기는 힘들겠지만.

그러고나서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2005년 겨울부터 다시 남미 음악과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라는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에 대한 책과 음반을 사면서부터이다. 남미의 음악과 문화에 대해서 처음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좋은 입문서인 듯 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아타왈파 유팡키, 메르세데스 소사, 안덱스, 콘도르, 빅토르 하라, 네루다, 피아졸라 이러한 단어들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마리아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공연을 다음의 클럽을 통해서 알게 되어 지하철역에 들으러 가기도 하였다. "그토록 화려하고 열정적인 삼바도 본래에는 가난하고 삶이 힘에 겨운 사람들의 슬픔을 덜고 또 그 고통을 잊고자 하는 몸짓으로부터 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의 한 모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일제 45년이 힘들었겠지만 그 기간에 비교할 수 없는 몇백년을 제국주의와 때론 맞서고 때론 침략당하면서 살아야했던 남미사람들의 슬픔과 한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하고 있다. 안데스 음악의 그 고요하고 명상적인 음악이 때론 힘겹게 버티면서 살아와야했던 그네들의 삶을 달고 있다는것, 탱고의 화려하고 신나는 음악속에 깃들여있는 애절함...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다시금 그들의 전통문화를 발굴해내고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남미의 저력을 새롭게 느끼고 있다.

위에서도 말을 했듯이 민요, 민속문화를 새롭게 발굴해내고 그 시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담아내고자 했던것이 누에바 깐시온 운동이다. 죽어버린 음악, 현실과 유리된 음악이 아니라 그 현실과 맞부딛치면서 성장을 해나갔다. 한때 라틴음악열풍이 불고 했던 것들도 다 이러한 기반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요즘 홍대클럽에서 가야금을 가지고 노래하는 가수를 알게 되고 그 음악을 계속 듣고 있는 중이다. 가야금의 그 애련한 가락이 또 트로트, 탱고와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국악이나 크로스오버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교보문고의 음악판매하는 곳을 가보니 생각보다는 국악쪽도 음반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 음악을 듣게 되어서 굳이 위에 누에바 깐시온 운동을 다시금 꺼내게 된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이든 연극이든 설사 다른 나라에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얼마나 우리의 감성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음악을 잘 아는것은 아니지만 젊음과 저항의 음악으로서의 락은 거세가 된채 랩과 힙합이 그냥 댄스음악으로만 되버리는 상황이 참 아쉬웠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꼭 그 형식이 도입된 이유나 사회적 상황을 알아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작자의 경우에는 어떤 것이든 내용과 형식이 있다고 하면 그 형식만 도입하는것이 아니라 내용도 함께 고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아뭏든 남미의 음악을 듣다가 가야금으로 된 음악을 들으니 우리네 음악상황을 여러가지 곱씹어보게 된다. 70년대부터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국에서 탈패등도 많이 생기고 80년대 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엄청나게 성장을 했었는데 현재는 그러한 흐름들이 끊긴지 좀 된 것 같다. 90년대부터는 문화의 시대라 할 만큼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문화산업시장의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을 한대로 무조건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와 함께 얼마나 버무려지고 섞여서 발전을 하고 있을까?? 요즘 한창 뮤지컬이 뜨고있는데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처럼 그냥 수입해오는게 아니라 우리네 감성으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만 영화의 시대, 그만큼 여러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영화가 발전을 해왔겠지만 거꾸로 천만명이 같은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가끔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가치가 함께 공존하면서 발전을 했으면 좋겠다. 음악이, 미술이, 예술이 중상류계층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의 삶과 함께 어우러져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부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kasi의 이미지

'요즘 홍대클럽에서 가야금을 가지고 노래하는 가수'

정민아 란 분 아닌가요?

yes24갔다가 추천앨범에 들어있길래 들어보았는데 좋더군요.

비회원 게스트의 이미지

정민아라는 분은 얼마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하셔서 들어봤는데 독특하더군요.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노래하시는게...사실 이게 우리에겐 어찌보면 익숙해져야하는 모습일지도 모르는데.
배철수씨랑 인터뷰하시는거보니 성격도 시원시원하신듯.

개인적으로 국악악기 연주(정통국악은 아니고 크로스오버)하시는 분 중에 해금연주하시는 정수년이라는 분의 음악이 참 좋더군요.
기회되시면 들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덧:일제 45년이 아니라 36년 아닌가요?

문태준의 이미지

말씀하신대로 정민아라는 가수입니다.
가끔 홍대클럽에 가서 음악을 듣는데 한번 가자가자 하구 계속 못가고 있습니다. 이번주 토요일(4.7)에도 다른 밴드와 함께 공연이 있지용. 아 그리고 착각을 했군요. 해방되던 해가 45년인거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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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710의 이미지

지난 금,토요일에는 슬랙커즈라는 스카 밴드가 내한을 했었습니다.
금요일엔 학업 때문에 못 가고, 토요일에 스컹크헬에서 공연을 봤는데 무척 재밌었습니다.
동영상을 거의 2기가 가량 찍었는데 언제 블로그에 올릴지 걱정이네요-_-
특히나 mov 파일이어서 youtube는 안되고 국내 업체들의 대부분은 거의 윈도우즈 전용이고
그나마 mncast가 좀 나은 편인데 용량 제한이 좀 있는 편이라..

아무튼 다음 주 정도에 한번 방문해 주세요~

akudoku.net

life is only one time

문태준의 이미지

다음 주 정도에 한번 방문해 주세요~ -> 이게 뭔말?
어딜 방문해달라는 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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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사용자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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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사용자의 이미지

처음엔 역한 맛의 홍어도 계속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듯이
음악도 그런 거 같아요.
앞에 대단한 수식어가 붙는 아티나 명반이라 불리우는 앨범들을 듣고
아님 취향이 아닌 장르를 넘보다가 여러번 지지쳤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귀가 번쩍.
처음엔 "이게 뭐야??" 하던게 나중엔 "워~ 이렇게 좋을수가!"
(암만 들어도 접수 안되는 음악도 있긴합니다 ㅋ)
위에 말씀하신대로 천만이 보는 영화, 댄스와 발라드만 넘쳐나는 가요판.
요샌 대중예술이 예술보단 산업에 훨씬 가깝다보니
눈만 뜨고 귀만 열고 있으면 다 알아서 팍팍 꼿히게 만들어진 것들만 넘쳐나서
사람들이 거기에 적응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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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라는 책도 추천합니다.
근데 정말 신기하군요. 제가 위의 책을 산게 사흘전인데, 마술처럼 이런 포스팅을 만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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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ngo의 이미지

http://freepiano.net

알아보니 입장료가 2만원이라 적지는 않지만, 와인과 간식이 제공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대안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KAIST출신 반도네온(아르헨티나 탱고의 대표적인 악기죠) 연주자 고상지씨 때문에 알게된 곳이죠.

문태준의 이미지

그냥 옛댓글들을 보다보니 atango 님이 freepiano를 소개해주셨군요. 그 소개받고 작년 5월달인가 말씀하신 고상지님의 반도네온 공연을 보러갔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음악을 그다지 잘 못 듣긴 했는데 어제 피아졸라의 탱고음악을 주문했지요. 그리고 국내에 나M님이라고 월드뮤직을 부르시는 가수분이 있어서 전에 모임때 앨범을 사서 하나 듣고 있지요. 이건 자작곡은 아니고 다른 곡들을 부른거죠.

와우! 하고싶은건 많은데 언제나 시간은 제한되어 있구. 세미나땜에 열심히 자료 정리해야겠네요. 아뭏든 예전 정보 알려주신 것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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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계속 올라오는군요..
저는 답변이 없을 줄 알았는데요.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는 칠레의 빅토르 하라를 중심으로 한 뉴에바 깐시온에 대한 내용이지요. 보려고 샀는데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고 이제 가방에 담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atango님 정보 감사합니다.

처음엔 귀가 들어오지 않는데 계속 관심을 가지고 듣다보면 조금씩 달라지더군요.
물론 정말 듣기 짜증나면 듣지 않는게 낫겠지만.

저는 최근부터 네이버의 월드뮤직카페에 가입해서 한달에 한번씩 음악감상회 모임을 다니고 있답니다. 이제 갓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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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글쎄요. 음악은 단순히 감정표현이상의 그 무엇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 보편적인 이해가 동반될 가능성이 없는 로컬한 음악들은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 매년 듣는 베토벤의 느낌이 달라지고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 소리가 무한을 뻗어 나가며 라비 샹카의 시타 연주가 마음 속 저 깊은 가라앉은 곳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차원 높음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쪽 방향을 잡고 있던가요.

kirrie의 이미지

베토벤이 보편적인가요? 존 콜트레인은? 라비 샹카 (는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도 그런가요?

그냥 '전 베토벤이나 존 콜트레인, 라비 샹카를 좋아합니다. 로컬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라고 써도 될 말을, '보편'이라고 적고, 월드 뮤직은 수준이 낮다, 라고 읽으시니 괘씸해서 한마디 붙입니다.

(아.. 아니면 이것은 혹시 고도의 낚시질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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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글쎄요. 전 월드 뮤직이 수준이 낮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고 로컬 뮤직이 싫거나 수준이 낮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고 님한테 괘씸한 짓을 한 적은 더더욱 없는데요?

다만 로컬 뮤직이나 월드 뮤직같이 특정 요소를 강조하는 음악을 감상한다는 사람들이 음악을 지나치게 그 지역적인 상황에 종속시켜 생각하거나 음악을 어떠한 사상이나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만 생각하기 쉬운 경향은 좀 언급하고 싶었는데 설명이 불충분했나요? 베토벤은 지역적으로 독일 사람이고 존 콜트레인은 아메리카 사람이며 라비 샹카는 인도 사람입니다. 베토벤은 클래식 음악 작곡가이고 콜트레인은 재즈 연주자이며 라비 샹카는 인도 음악 연주자입니다. 이정도면 이들 대가 모두 월드뮤직 혹은 다른 남미 음악가들 만큼이나 로컬한 음악가들이고 장르도 각각 다르지만 이들 음악의 감동은 universal 한 측면이 있는 것 아닌가요?

뭐 개인의 취향이야 각자 마음대로이고 존중해 주면 끝납니다. 하지만 같은 음식도 그렇죠. 싸구려 라면도 맛있고 공들여 만든 요리도 맛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라면만 먹어서는 영양분이 부족하죠. 하지만 라면도 적절히 잘 요리하면 영양가 충분한 라면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진수성찬도 잘못 요리하면 먹어봐야 기름기에 살만 찌지 않겠어요? 음악도 마찬가지이고 월드 뮤직을 들을 때도 그 점을 신경써서 듣는 게 중요하지 않나요? 정말로 이 음악이 가능성이 있는 음악이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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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로컬 뮤직이나 월드 뮤직같이 특정 요소를 강조하는 음악을 감상한다는 사람들이 음악을 지나치게 그 지역적인 상황에 종속시켜 생각하거나 음악을 어떠한 사상이나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만 생각하기 쉬운 경향은 좀 언급하고 싶었는데 설명이 불충분했나요?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제 이해가 부족했던 모양이네요. '괘씸하다'라고 표현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베토벤이나 존 콜트레인 (혹은 당대의 재즈 연주가들) 이 전세계적으로 소비되는 과정은 그 음악들이 가지는 '보편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이 식민지배시대를 거치면서 자국 문화를 피식민지에 '배포'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음악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화를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니란 것이죠.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

네, 사실 어떤 음악이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그렇지요. 이렇게 보면 클래시컬 뮤직들은 모두 종교 음악이었거나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음악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영웅'은 나폴레옹에게 쓴 곡이었다죠? 바흐의 '음악의 헌정' 또한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바치는 노래였습니다.) 재즈가 언제부터 추상적인 고급 예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작은 흑인들의 한을 그들의 토속적 리듬으로 표현했던 것 부터가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나요?) 우리가 모두 종교인이거나 모두 귀족이거나 모두 흑인이 아닌 이상, 특정 계층,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이 음악들을 마치 자신의 음악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클래시컬 뮤직이나 재즈를 듣고 감동합니다. 이 감동은 진짜입니다. 저도 감동을 느낍니다. 왜 일까요? 전 그 음악들이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기서 우리가 감동을 느낄만한 어떤 요소들을 자기의 현 상황에 비추어 발견해 냈기 때문이지요.
로컬 뮤직이나 월드 뮤직은, 그것이 특정 지역의 특정 계층을 위한 음악이었다고 해서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우리가 충분히 이런 음악들을 소비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이런 음악들도 상업적 타당성 때문에 혹은 이념적 배타성 때문에 애초에 선택할 기회조차 박탈되었던 시대가 지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시대가 온다면 익명님이 말씀하시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anouar brahem trio라는 재즈 그룹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 음악은 (그쪽으로 조예가 없어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동풍의 선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쪽의 민속음악을 토대로 재즈를 연주하는 그룹인데요, 이게 상당히 중독적입니다. 한국인인 제가 어째서 중동쪽의 민속음악 같은 재즈를 들으며 중독되어야 했을까요? 어떻게 보자면 그들의 음악들도 로컬 뮤직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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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달을 가리키는데 자꾸만 손끝을 보겠다면 더이상 얘기를 전개할 것이 없어진다는 얘기를 우선 하고싶네요. 그래서 클래식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가 없었으면 지금의 권위(?)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재즈는 여전히 흑인의 한을 토속적 리듬으료 표현하는 데 뿌리박고 있으니 귀족이 되어야 클래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흑인이 되어야 재즈를 자신의 음악처럼 느낄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렇다면 독일 인종주의를 대놓고 설파한 바그너의 음악은 당연히 연주 금지 대상이 되어야 하겠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곡을 공연하겠다는 유태인 지휘자는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사람이 되어야 하겠군요.

소위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느끼는 감동은 개인적인 차원이 일차적으로 작용하지만 개개인의 감동이 신기하게도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같은 패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은 스스로 제대로 경험해보기 전에는 그 진가를 알 수 없습니다. 뭐 개인차가 있기는 해요. 소리굽쇠 두개를 공명시킬 때도 서로 주파수가 맞아야 잘 되듯이 어떤 사람은 쇼팽의 피아노곡에 어떤 사람은 빌 에반스의 재즈 피아노 연주에 좀 더 쉽게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개개인의 감동들이 다 제각각 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만들어진 예술작품일수록 사람들은 쉽게 이 감동에 공감하며 공명의 깊이도 깊어지며 무엇보다도 그 패턴이 일치합니다. 이것때문에 제가 보편성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베토벤을 들으면서 열정적인 느낌이다는 표현을 하는 것 몇 차원 위의 얘기가 있어요.

이런 것을 알아보는 것은 청자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이 이미 이념이니 민중의 삶의 의미 같은 색안경을 한참 끼고 있으면 아무리 명곡 명연주를 들려줘봐야 느끼는 감동의 수준이 그 색안경 레벨 이상을 못올라갑니다. 비슷한 예로 오래전 한때 대학내 집회때 갑자기 락밴드들을 저항의 락 운운하면서 불러 모으기 시작했지요. 과연 그때 그 밴드들이 지금은 어떤 음악을 하고 있는지, 그 때 저항의 락 운운하던 사상가들과 청중들 덕에 락음악에 어떤 성장이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과연 락음악에는 저항이 요체인가요?

뭐 지금의 월드뮤직이 100여년전의 재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 당시 재즈야 뉴올리언즈 사창가에서나 듣기 좋은 음악 아니었어요? 그리고 월드뮤직이 정말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곧 재즈와 같이 성장해 나갈테니 다행일 것이구요. 하지만 이미 여기 글타래에서 월드 뮤직을 좋아한다는 분들이 이미 제 3세계니 남미의 빈민과 같은 사회적 기준을 언급해가며 공감을 느낀다는 것은 별로 좋은 시그널은 아닙니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원더걸스를 들으면서 그 끈적끈적한 박진영식 에로티즘을 온몸으로 만끽하는게 훨 나을 수도 있어요.

제 입장에서는 남미쪽 음악이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발견해 주면 좋습니다. 들을 것이 다양해지니까요. 인도 음악만 해도 사람을 모습이 다른 또다른 행복에 젖게 만드는데 남미가 여기에 가세해 주면 더 좋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음악 대부분은 이런 100년전 재즈의 가능성조차 없는 작품들이 거의 99%입니다. 소위 돈벌이용 음악들은 설탕같은 달콤함으로 귀를 끌다가 잠깐 돈벌이 유행이 끝나면 곧 사라지고 자본의 이해를 거부한다는 작품들은 그 저항의 굴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다 자멸하기 쉽상이더군요. 월드뮤직 역시 이 두가지 간단한 분류에 필터링 당하는 신세라면 솔직히 그런 음악을 듣는 건 시간낭비입니다. 한 때 잠깐 좋기는 하겠지만요.

바흐의 무반조첼로조곡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바흐의 곡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게 보기와는 달리 은근히 깊이가 있는 곡이고 연주자에 따라 재해석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바흐의 경우 대부분 심각하고 진지하게 곡에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여기 요요마의 연주가 볼만합니다. 요요마의 바흐 무반조첼로조곡은 솔직히 너무 가볍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좀 짜증이 나기도 하죠. 바흐의 곡이 이렇게 깊이가 없는 곡이 아닐텐데 이 사람의 연주는 도데체 멍청해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요요마의 연주가 또다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 이런 요요마식 "즐거운 음악하기" 연주가 원래 바흐 무반조첼로조곡이 갖고 있던 춤곡의 측면을 살려냅니다.

이런 부조리조차 초월해버리는 무한함의 시연이 예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어요. 즉, 진지한 연주들은 깊이가 있지만 즐겁지 못하고 가벼운 연주는 춤추듯이 즐겁기는 하지만 깊이가 있지 못하지요. 하지만 두 연주 모두 어찌된 판인지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이런 부조리하고 복합적인 속성이 아무런 문제없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바흐의 소위 작품 레벨입니다.

월드뮤직도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겠지요. 적어도 제 경험에서 클래식, 재즈, 인도 라가 연주에서는 이런 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국악은 그다지 많이 들어보지 못했지만 은근히 지루한 정악이 이쪽에 더 가깝더군요. 어쨌거나 월드 뮤직을 들으면서 이런 예를 참고로 해 보시길.

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흠. 쓰고보니 오타가 있네요. 무반주첼로조곡입니다.

daybreak의 이미지

현대음악사를 관심분야로 정한 음대교수가 아니거나, 또는 현대음악 전문 평론가가 아니신 다음에는 어차피 그냥 좋아서 듣는 분이실텐데 귀가 좀 트이셨다고 그냥 마구 적으시는 것 같군요.

KLDP를 음악을 잘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썼다면 오판이라고 말하고 싶고,
또 자신의 편향된 의견이 무슨 권위나 있는 것 처럼 이것 저것 평가하고 있는데
조금 귀가 트였다는 분들이 이런 식으로 글을 적는 것 개인적으로 참 안좋게 생각합니다.

> 잘 만들어진 예술작품일수록 사람들은 쉽게 이 감동에 공감하며 공명의 깊이도 깊어지며 무엇보다도 그 패턴이 일치합니다. 이것때문에 제가 보편성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의 문장은 참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요.
"잘 만들어진 예술작품" 의 범위부터 문제고
"사람들은"이 누구를 말하는지 역시 문제고
"패턴이 일치한다"라는 말은 감히 어떻게 쓸수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구요.
상업예술이 됐든 순수예술이 됐든 "보편성" 이라는 말을 쓸 때는 매우 매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데
서슴없이 저런 애매한 수식 문장을 붙이면서 쓰시는군요.

익명으로 쓰신 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는데,
이미 글 쓰신 내용에 모순과 오류가 가득하죠?
별로 재고의 가치가 없어보입니다.
제 눈에 이 익명사용자가 적은 글은
요 아래에 어떤 분이 적은 노트북 사용기만큼이나
별로 촛점없이 "나 음악 좀 들어봤다" 라고 내세우기만 하는 글 같군요.
그 글은 "나 노트북 좀 써 봤다" 를 주장하고 있죠?

아, 지금 라틴 뮤직이 100년전 재즈보다 가능성이 없다구요.
아마 130년전쯤 태어나셔서 100년전에 재즈를 들으셨으면
"그런 깜둥이가 하는 싸구려 술집 음악 따위는 클래식에 비할 바가 아니다"
"피아노를 무슨 장난감으로 아는가?"
라고 하셨을 분이라 생각합니다.

daybreak의 이미지

덧붙여서, 이 익명사용자가 쓴 것 같은 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납니다.

정작 우리돈 2만원 안쪽에서 대충 좋은 와인을 마구 마실 수 있는 유럽에서는
그냥 대충 자기가 좋은거 찾아서 마시는데,
이게 물 좀 많이 건너와서 한국이나 일본에 오면
기본적으로 와인 마신다고 하면 반쯤 소믈리에나 되는 것처럼
어쩌구 저쩌구 읊는데
그러면서 정작 진짜 맛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떠오르는군요.

이 분이야말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고
달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글쎄요. 왜 그리 제 입장을 삐딱하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KLDP가 좀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 전 라틴음악, 월드뮤직, 로컬뮤직 무엇이든 가능성이 없다고 한 적이 한번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이게 100년전의 재즈의 모습일 가능성은 항상 열어 두고 있어요. 피아졸라의 탱고 곡을 난생 처음 들으면서 루이 암스트롱이 떠오르는 건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되어 가능성조차 없는 음악들이 많은 것은 사실 아니겠어요?

음악 듣는 것이 고상한(!) 취미가 될 수 있지만 이걸로 별로 폼 잡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다만, 제 3세계 음악을 굳이 제 3세계라는 관점으로 한정시켜 얘기하겠다면 대비를 위해 이런 폼잡기를 해 보는 겁니다. 그렇지만 또 제 3세계 음악을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 그 자체는 나쁘다고는 생각안해요. 뭐 음악이야 나 좋으라고 듣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이상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고 거기에 한정되기에는 좋은 음악의 가능성이라는게 무한하기에 그걸 알리려 글을 길게 늘어 적는 겁니다. 이런건 몰라도 세상 사는데 하등 지장이 없지만 이왕 음악 듣는 게 좋으면 행복할 정도로 좋은게 바람직하지 않겠어요?

뭐 와인 얘기가 나왔으니 링크나 하나 보내 드리죠. 한국일보 서화숙기자의 블로그입니다. 참고로 전 와인은 마실 줄 모릅니다만 와인을 마시는 경험도 이렇게 패턴이 나올 수가 있어요. 서화숙씨도 고상한척을 즐기는 소믈리에 나부랑이는 아니라는 점 유심히 봐 주셨으면 하네요.

http://blog.hankooki.com/blog.php?blogid=naticle&page=11

daybreak의 이미지

음악은 문화적 산물입니다.
한 사회, 또는 집단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구분되는
지적, 물질적, 정서적, 영적인 요소를 오랜 기간동안 축적합니다.
문화를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이러한 문화적 산물 중 하나가 음악이죠.
이건 굳이 저명하고 권위있고 고상하신 인문학자나 사회학자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중등교육 이상을 수료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익명사용자는 음악에서 그러한 정서적 측면을 고려하는 것을 "색안경"을 끼고 있다고 말합니다.
문화적 산물을 접하고 논하는데 역사적 측면과 정서가 배제된다면 이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죠.
좀 다른 분야지만 이러한 고려가 없다면 우리는 여러 친일 시인이 일제시대때 쓴 시 또한
"아름다운 시이기 때문에"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256
이러한 시도 우리는 응당 감상하면서 진한 감동을 받아야 마땅하겠습니다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되어 있지요.
전혀 역사적, 정서적 맥락을 알 수 없는 아랍인이
이 시를 보면서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것은 좀 말이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맥락을 알게 되면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못할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요?

"나는 클래식보다 나훈아, 심수봉이 더 좋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한 순간에 "그 이상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고 거기에 한정되기에는 좋은 음악의 가능성이라는게 무한하기에" 라고
좀 다르게 듣는 사람들을 자기보다 한 수, 또는 몇 수 아래의 사람으로 낮춘다든지,
"이왕 듣는거 행복할 정도로 좋은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라면서 은근히 자신이 듣는 방법이 그러한 방법임을
강조하는 글을 적는데, 앞서 적은 글에도 기분 나쁠 정도로 완곡하게 비하하는 표현이 한가득하죠.

그렇다 하면, 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댁이 말한 그 가능성을 포기하고
쓸데없이 정서적인 측면에 집착하는 것을 무려 학문의 한 분야로 만드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겠군요.

이런 표현이 음악을 안들어본 사람이면 넘어갈만한 말이지만,
좀 들어본 사람이면 순전히 자기 자신의 기준을 남들에게 설파하거나 자랑하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는 순간 짜증이 확 나더만요.
아, 네, 댁이 말한대로 들을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다르게 듣는 사람도 참 맞습니다.
댁이 듣는 방법만 최선이 아니라는 말이죠. 좀 겸손해지실 필요는 조금도 못느끼시죠?

네, 댁의 관점에서 주는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관점이 다른 사람들을 은근히 폄하하고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이런식으로 글을 적지는 마세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이왕에 들은 탱고음악을 좀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을 해보시죠.
왜 클래식을 하려고 했던 피아졸라가 탱고로 전향하게 됐으며
이 양반이 어떤 삶을 살았고, 탱고 음악이라는게 어떤 것이며,
왜 피아졸라가 탱고음악을 했을때 기존에 탱고음악 하던 사람들한테 욕을 들어먹었나 등등...
찾아볼 것은 참 많습니다.
이왕에 하는 김에 탱고도 배워보시지요. 위에서 말한 것 다 필요없습니다.
"하늘을 붕붕 나는 느낌" "은반위에 내가 옥구슬이 되어 매끈하게 미끄러지는 느낌"
이런 말도 필요없습니다.
아마 그 이상의 감동을 받으며 온몸으로 탱고 음악을 느끼시게 될 겁니다.

저도 색안경을 끼고 있는 건가요?

문태준의 이미지

생각외로 계속 글들이 올라오는데요. 제가 요즘 바빠서 글을 보고도 답변을 못 썼습니다만 간략히..

익명사용자님이 말씀하신대로
"글쎄요. 왜 그리 제 입장을 삐딱하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KLDP가 좀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
--> 저도 그런 느낌을 많이 받지요.

kirrie님이나 daybreak 님의 말씀은 이해는 가지만 제 생각엔 익명사용자님이 말씀하신것을 너무 까칠하게만 받아들이시는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누구누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이에 대하여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실듯한데요. 익명사용자님이 말씀하신것도 원래 까칠하게 말씀하시려는것은 아닌 듯 하구요.

칠레의 시인이자 사회활동가였던 네루다(중요한건 아니지만 노벨문학상도 수상)의 글중에서 생각나는게 있는데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어간다.
그러나 단지 리얼리즘적이기만한 시인 역시 죽어간다."

네루다의 글에서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어떤 예술장르를 넣는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시를 가지고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아래는 일부 예전에 적었던 글)

사랑시를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우리네 사랑은 항상 단순한 이성적 감성때문에 마음 애린 것 말고도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처럼 때론 다른 외적인 것때문에 그 사랑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다. 이건 실제 우리네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 네루다는 "순수한 서정시"에 대하여 비판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무조건 현실을 담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옳다고 말해서 세상이 변화되는것이 아니듯 문화나 예술이란 것이 단순하게 특정 이념을 담아내고 그것을 강요하는것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어떠한 것을 담아낸다고 해도 그에 맞는 치열한 예술적인 형상화가 필요할 것이다.

제 개인적으로도 내용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회적 배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술이란게 또 그 내용과 메시지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순수예술, 참여예술등의 논쟁도 있을 수 있겠지요. 예술, 문화라는 것이 그것이 다루는 내용과 함께 그 형식, 기술적인 면도 중요한 측면이란 생각이 듭니다. 또 사회적인 측면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이러한 것에 환원시킬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남미음악의 경우도 부러웠던 것은 그 메시지의 치열함만이 아니라 우리네에 비하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더 많이 담고 있고 그려내고 있는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을 다양한 음악적 형식에.

적고나니 아리송한 박쥐같은 글이 되었는데 아뭏든 우리 서로 너무 까칠하게 살지 맙시다. 최근 신문을 보는데 다문화가 아니라 상호문화라는 것을 다루는 학회가 있더라구요. 다문화는 여러가지 다양성을 더 고려한 것이라면 상호문화는 그 관계의 중요성을 더 부각하려 하는듯. 이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는건 아니고 그냥 아 저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는거구나라는 기회였지요.

모두모두 즐거운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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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네. 색안경 끼고 보는 것 맞습니다. 듣고 나서 거꾸로 색안경이 무엇인지 파악해야지요. 나훈아 심수봉도 들어보면 은근한 깊이가 얼마나 재밌는데요. 다른 예로 클래식 전공하는 사람들이 연주를 못하면 선생이 "너 재즈하냐?"라고 타박을 준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들 역시 재즈의 참맛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소수이더군요. 클래식 듣다가 최종역은 결국 재즈로 가더라... 이런 얘기가 괜히 자주 들리겠습니까.

전 피아졸라는 잘 모릅니다. 기껏 들어본 건 여기 글에서 보고 oblivion 하나 찾아봤어요. 하지만 피아졸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우울함이 연상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보다 청중들의 댄스에 신경을 더 써야 했던 루이 암스트롱이나 그 이전 재즈 연주자들의 느낌이 전해지는 정도면 적어도 제 입장에서는 피아졸라의 곡에 어느 정도 공명하는 방향을 바로 잡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이것도 제가 잘난척을 하는 것인가요? 이 정도만 해도 피아졸라의 인생의 작은 한 부분을 굳이 해설 자료 찾아보지 않고도 그의 곡을 통해 느끼고 있는 거잖아요.

어차피 음악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밖에 느낄 수 없으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한 공감에 대해서 얘기하면 오해가 많이 일어납니다. 음악이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얘기하는 것은 그것을 초월하는 universal한 그 무언가를 지칭하는 겁니다. 그걸 맛보려면 일단은 음악 외적인 것을 감상에 끼워 넣지 마세요. 그 순간 감동의 한계가 거기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제 3세계 음악 자체를 폄하하고 이럴 생각 전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능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이쯤 적겠습니다.

daybreak의 이미지

댁이야말로, 색안경을 쓰고서 universal한 무엇인가가 궁극적인 감상의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찾으면서 안쓴척을 하는군요.

미학을 연구하던 초기에는 댁과같은 시도들을 했었죠.
그런데 요즘엔 그런 연구보다 다른 연구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오히려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있는대로 다 끼워넣어서 연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생각이 최선이라고 판단된다고 하여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댁이 말하는 그 유니버셜한 무엇은 이미 플라톤이 살아있던 시대부터 얘기가 되오던 것입니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많이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수가 없나보군요.
이렇게 꽉 막히셔서 어디 음악 제대로 들으시겠습니까?

댁의 색안경은 "고전미학 관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면 음악을 제대로 듣는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거는 모르시죠?

문태준의 이미지

오늘 피아졸라의 탱고음악 앨범을 하나 받았습니다.
탱고쪽으로는 유명한 사람일겁니당.
the tango way - the classic way

근데 좀 먼가 밋밋한... classic way 랑 먼가 연관이 있나?

지금 저 앨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탱고의 아버지` 피아졸라(1921-1992) 사후 10주기 추모 앨범!
이라고 나오는군요.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조금씩 집중해서 듣다보면 또 새로운 맛을 찾을수도.

아 요즘 계속 홍대음악클럽을 못 갔네요. 개인적으로는 이것저것 하는걸 좋아하는데 참 주변에는 그다지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akudoku 님 언제 자주 가시는데 한번 불러주세요. 제가 술은 쏘죠. atango님도 자주 가시는데 불러주삼~~ 아참 작년가을인가? 빵에서 나오는 앨범은 샀죠. 빵은 간혹 갔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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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ngo의 이미지

요새는 별로 가는 곳이 없습니다. 고상지씨와 두번째 달/바드의 재즈/아이리쉬 기타를 하시는 김정환씨가 탱고 듀엣을 만들었더군요. 얼마전 극동방송국 근처 (방송국에서 지하철 상도역 방향) 호호미욜이라는 카페에서 두 사람 공연을 들었습니다.

아늑한 커피점인데 이곳에서 종종 작은 음악회를 한다고 하더군요.

피아졸라라면 월드뮤직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어떤 분 쓰신 기준으로는 세계인이 좋아하는 보편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다보니 클래식/재즈/팝 여러 장르로 재해석되어 너무 많은 음반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피아졸라 국악음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취향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피아졸라가 직접 반도네온을 잡고 연주한 음반들을 좋아합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Rough dancer and Cyclic night"(왕가위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음반이죠) "Zero Hour" "La Camorra" 등이 제가 좋아하는 음반들입니다.

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위의 글 올린 익명사용자입니다.

글 올린김에 저도 궁금해서 피아졸라의 음악이 올라와 있는 페이지를 좀 찾아봤습니다. Oblivion을 들어 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생각보다 팍 와닿는 아티스트는 아니네요. 첫인상은 마치 빌리 홀리데이를 연상하게 하는 우울함과 슬픈 느낌이 주조이고... 정제된 느낌보다는 신파조에 가깝네요. 개인적으로 신파도 무척 좋아합니다만 약간은 거친 느낌이 신파를 세련된 느낌으로 가꾸어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감정표현이 좀 울컥거려요. 영화음악 같은 곳에 들어가면 무척 좋지 않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눈에 확 띄이는 것이 슬픈 주조를 순간 변화시켜나가는 피아졸라의 모습이네요. 아쉽게도 피아졸라의 직접연주는 검색을 못했는데 순간 슬픈 주조를 에너지가 넘치는 탱고 선율과 리듬으로 소위 transform시키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빌리 홀리데이는 그저 슬픔에 찌들다가 죽어가는 느낌인데 oblivion에서 피아졸라의 스타일은 여기서 어쩌면 폭발적일수도 있는 에너지를 순간 확 뽑아내는군요. 이 부분 누군가가 해석을 잘 하면 아주 괜찮은 연주가 나올 수 있을 듯 하네요. 아마도 이 부분에서 피아졸라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좀 아쉽네요. 루이 암스트롱 이전의 재즈 연주를 보는 느낌인게... 아마도 이 사람은 독주보다는 탱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위해서 연주를 더 많이 했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자신의 목소리보다는 주위 환경이나 무대 상황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그런 느낌이 많이 듭니다.

어쨌든 느낌이 나쁘지 않은 아티스트입니다. 조금만 더 정제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감도네요.

Darkcircle의 이미지

요즘 음반 시장이 살아 있긴 한가요??
거의 99.98%는 염장성이지만... 여자친구가 타국에서 외로이 지내기 때문에
괜찮은 아티스트의 음반을 보내려고 하는데요...
문제는 국가마다 다르겠지만 복제음반 CD를 보내면 벌금을 왕창 무는 경우가 있죠.
뭔 음반이 어디서 어떻게 파는질 알아야 말이죠.

(지금 제 동네에선 음반가게가 거의 없습니다. 역이나 큰 번화가에 나가야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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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 군대에서 멀쩡한 몸으로 18시간 자봤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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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이 되자 (/ㅂ/)

문태준의 이미지

CD등 판매하는 쪽은 엄청나게 매출액이 줄었지요. 그런데 MP3, 벨소리등 각종 디지털관련한 쪽은 오히려 엄청나게 시장이 커지고 있지요.

그런데 정작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이나 가수들은 돈 별로 못 받구요 오히려 이동통신회사같은데가 더 배부릅니다. 불법다운로드때문에 음반 판매가 안된다고 하는데 실은 이건 가수들말고 음악유통시장에 있는 회사들의 아우성이랍니다. 그때문에 가수나 창작자들도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은 하는데 워낙 공룡들이랑 싸워야하니 쉽지 않고 또 이해관계가 복잡해서 해결이 쉽지 않은듯.

유럽의 경우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두면 정작 자유로운 예술가들은 다 굶어죽을 수 밖에 없기에 사회보장제도를 통하여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경우도 문학하는 사람들, 예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달 100만원도 받지 못하고 극빈층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럽의 경우는 문화뿐만 아니라 신문사도 경쟁에만 내맡겨두면 광고에 의존하고 기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에 일정하게 국가차원에서 운영비를 보조하고 공동배달시스템등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독일에 있는데 영화도 실업자, 노약자, 돈이 없는 사람은 더 저렴하게 또는 공짜로 공연관람할수 있던 것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돈이 없어도 누구나 삶의 권리로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것! 쿠바의 경우 사회체제가 다르기에 직접 비교는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 돕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사가 된다고 하는데(이건 KBS등 일반방송에서도 몇번 소개되었음) 우리네 의식과 비교했을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야 문화나 음악쪽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한 문화가 계속 숨쉬고 함께 공존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에 이러한 현실이 가슴아프네요. 그러하기에 인디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20대초중반이 많지 다른 나라처럼 30대 이상이 거의 없습니다. 이건 정말 사회적으로 보았을때도 가슴아픈 일이지요. 우리네 삶이 빵만으로 살수가 없는 것이구 다양한 문화적 경험, 정신적인 충족함도 중요한건데요. 대학로를 문화의 거리로 만든다고 하여 이런저런 지원을 했는데 오히려 거기에는 문화와 상관없는 다른 것들만 들어서서 정작 연극하는 사람들, 예술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여 대학로를 떠나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죠.

아 이거 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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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사용자의 이미지

한국에서 재능있는 창작자들이 그만한 수익을 못올린다는 것은 큰 문제이지요. 최근들어 왠만한 음반 매장들은 거의 다 없어져버렸고 거칠지만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밴드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가고 있어요. 특히 클래식 공연을 잘 찾아다니는 저같은 경우는 공연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돈 주고 좋은 좌석에서 집중해서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좌석 배정이 안된다는 거에요. 대부분의 좋은 좌석들은 후원 기업 초대권으로 나가 버리는데 이들 초대권으로 입장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공연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연주자들도 뭔가 붕 뜨는 연주를 하게 되기가 쉽상이고... 폼 잡으러 지루한 클래식 공연장에 오는 관행은 이제는 좀 바꾸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현실이 그렇지 않죠.

그런데 예술도 시장을 통한 해결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많은 경우 시장의 독점 문제를 만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통망을 쥐고 있는 기업들이 사실상의 독점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죠. 음반은 유통사, 영화는 영화관 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시장의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쉬운데 시장 독점 문제는 경쟁을 활성화 시키는 구조로 나가는 게 가장 바람직해요. 예를들어, 좋은 신예 밴드가 있는데 이들의 공연을 유치하려고 클럽 여러 곳이 오퍼를 넣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는 거죠.

아이러니칼하게 "자본의 논리"를 싫어하는 문화계가 의외로 정부라는 공공기관에 기대다가 새로운 창작인들의 가능성을 발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선발이 되어야 하고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공연 한번 더 하는데 신경쓰는 아티스트보다는 오찬회 참석해서 얼굴 한번 더 알리고 분위기 띄워주는 사람이 돈 타갈 가능성이 높아요. 은근히 문화쪽에도 정부 실패가 시장 실패보다 더 좋지 않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점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어쨌든 한국은 시장이든 정부든 이런 아티스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해요. 일본만 봐도 그렇지 않은데 한국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한국 영화도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관객 동원은 결국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의 여부보다는 마케팅의 승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chunsj의 이미지

지금의 웹하드들이 트래픽으로 돈을 받고 있는 것 처럼 음악가 - 창작을 하는 - 들과 소비자들을 연결하는 시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시장을 제공하는 - 시장은 오픈되어야 겠지요, 일부가 독점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 사업자의 비용과
음악에 대한 댓가를 같이 치루고 살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제작사라는 또 하나의 권력이나 멜론과 같은 독점적인 시장이 있는 한
소비자와 창작자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와 제작사/독점적 지배자의 문제가 계속될 것이고 말씀하신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는 소비하기 어려운 음악을 팔고 창작을 한 사람은 노력에 대한 댓가를 못 받는 현재가 잘못된 구조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