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컴퓨터, 누가 누가 제일 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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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처 : MicroSoftware/

언젠가 누가 말하길 중형이나 대형 컴퓨터는 조만간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책상 위에 올라갈 수 있는 크기의 데스크탑 컴퓨터, 혹은 그보다 작은 크기로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하긴 예전 대형 컴퓨터의 성능을 오늘날 우리는 바로 책상 위에서 쓰고 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MIPS(Million Instruction per Second)라는 연산 성능 단위를 작은 컴퓨터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개인용 컴퓨터 안에 들어가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들은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성능이 높아져버렸다(물론 요즘에는 MIPS라는 단위도 별로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중대형 컴퓨터 기종은 여전히 나름대로의 영역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슈퍼 컴퓨터의 경우도 군사용이나 기상예보, 금융, 자동차와 비행기 등의 설계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그 위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슈퍼 컴퓨터를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슈퍼 컴퓨터의 경우 성능보다는 가격면에서 더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령 IBM이 제작해 미국 로렌스 리버모어(Lawrence Livermore) 국립 연구소에 설치한 블루 퍼시픽(Blue Pacific, 모델명 SP604e) 기종의 가격은 자그마치 9천4백만 달러나 된다. 대충 1억 달러라고 했을 때 우리 돈으로 1천2백억 원이나 된다. 그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아무튼 상상도 못할 정도의 돈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만하임 대학교와 테네시 주립대학이 협력해서 만들어 놓은 'Top 500 Super Computer Sites'에는 전세계의 슈퍼 컴퓨터들을 성능 순서에 따라 상위 500개를 나열한 목록을 만들어 놓고 있다(http://www.netlib.org/benchmark/top500/top500.list.html). 이 목록은 1993년부터 6개월마다 갱신되고 있는데 현재의 1위 자리는 인텔이 만들어 미국 샌디아 국립 연구소에 설치한 ASCI Red 기종으로서 그 내부의 프로세서 개수는 자그마치 9,632개나 된다. 이 많은 프로세서들이 병렬로 연결돼 동작하는 것이다. 표를 훑어보니 우리나라의 슈퍼 컴퓨터도 몇 개 보여서 그 수를 세어봤다. 76번째, 116번째, 143번째, 365번째, 381번째 등 총 5대. 전체 500대 중 절반 이상이 미국에 있고, 독일과 일본도 만만치 않은 대수를 가진 것을 보면 그 대수는 국력과 과학 기술력에 비례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한편 IBM에서는 현재의 슈퍼 컴퓨터보다 훨씬 더 높은 성능의 기종을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그 이름은 블루 진(Blue Gene). 청바지라는 뜻의 블루진은 아니다. 이 이름에서 '블루', 즉 청색은 IBM을 상징하는 색인데 예전부터 IBM을 빅 블루(Big Blue)라고 불러왔음은 유명하다. Gene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새로운 기종이 제약회사와의 협력 아래 인체 DNA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용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IBM 슈퍼 컴퓨터의 최상위 기종에는 블루라는 단어를 넣곤 하는데 앞서 언급한 블루 퍼시픽도 유명하고, 2년여 전에 러시아 출신의 체스 세계 챔피언인 게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를 이겼던 딥 블루(Deep Blue) 기종 등도 모두 '블루'라는 돌림자를 가진 형제 자매 지간이라 할 수 있겠다.
블루 진의 초당 연산 능력은 가공할 만하다. 초당 1페타(Peta) 개의 명령을 수행한다. '페타'라는 지수 단위는 처음 들어본다고? 독자 여러분은 메가(Mega), 기가(Giga), 테라(Tera)에 대해서는 물론 들어봤을 것이다. 1메가는 10의 6승, 기가는 10의 9승, 그리고 테라는 10의 12승이다. 페타는 바로 그 위쪽의 단위로서 10의 15승이다. 우리말로 풀어 말하자면 1천조 개인 것이다. 이를 위해 블루 진에는 자그마치 1백만 개에 달하는 프로세서가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퀴즈를 내보겠다. 페타 위는 무엇일까? 엑사(Exa)이다. 엑사는 백업 테이프 업체인 엑사바이트(Exabyte) 덕분에 좀 귀에 익은 것 같기는 하다. 엑사 다음은 필자도 모른다.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칠줄 모르고 높아가는 슈퍼 컴퓨터의 성능을 볼 때는 머지않아 알아야할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정말 골치 아픈 세상이다.
앞서 설명한 세계 500대 슈퍼 컴퓨터 랭킹에서 특이한 녀석이 하나 있다. 다른 모든 컴퓨터들의 제작사가 IBM, Cray/SGI, 썬, SGI, 인텔, 후지쯔, NEC, 히타치 등과 같은 기존 컴퓨터 업체로 적혀있는데, 44위에 올라가 있는 'Cplant Cluster'라는 기종의 제작사는 셀프 메이드(Self-made)로 표시돼 있다. 물론 그런 이름의 업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컴퓨터가 설치돼 있는 미국의 샌디아(Sandia) 국립 연구소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격은 상당히 싼 편이다(http://www.cs.sandia.gov/cplant/). 최상급의 다른 기종들이 거의 1억 달러에 가까운데 비해 이 컴퓨터는 그 10분의 1도 안되는 750만 달러 정도의 비용 밖에 안들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을 만드는 데 쓰인 부품이 컴팩에서 만든 580대의 일반 PC급의 컴퓨터라는 사실이다. 또 이 PC급 컴퓨터를 한 대 한 대 붙일 때마다 그만큼 성능도 늘어난다고 한다. 슈퍼 컴퓨터 업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가? 여러분도 집에 여분의 PC가 있다면 함께 묶어보지 않겠는가? 단, 이들을 묶어주는 장치와 그 소프트웨어는 스스로 개발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