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합?
가독성을 제외한 일체의 화질에 극히 둔감하고 3D 게임도 거의 안하는지라 평소 그래픽 어댑터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년 동안 어찌 하다보니 서 너 대의 컴퓨터에서 모두 Matrox 제품만 사용해왔습니다. 물론 저는 Matrox 직원도 아니고 딱히 MGA 팬클럽도 아닙니다.
최근에 새 컴퓨터를 하나 추가하면서 무조건 싸구려 그래픽 어댑터를 고르다보니 평생 안 쓰던 ATI를 사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확히는 세 시간 전까지) 제 방에 있는 두 대의 컴퓨터는 대략:
- 옛 기계: Asus board + PIII (700 MHz) + 384 MB + MGA Millennium G400 (? MB)
- 새 기계: Intel D865PERLX + P4 (2.8 GHz) + 512 MB + ATI radeon 7000 (32 MB)
일단 새 기계에 Gentoo를 깔아보았습니다. Stage1부터 꽤 공격적인 옵션으로 (-marc=pentium4) 빌드했음에도 Gnome 2.4의 첫 인상은 좀 느리더군요. 물론 커널은 2.6.5였고 옵션도 꽤 다이어트해 두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냥 '역시 Gnome 2.4는 느린가보다'였습니다. 이 기계에 MS Windows를 깔아본적이 없으니 비교도 안되고, Gnome 2.6으로 업그레이드해보지 않았으니 막연한 기대만 있는거죠. 특히 XChat과 Gnome terminal 배경을 투명하게 지정한 후에는 상당히 눈에 띄게 느려지더군요. 뭐,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며칠 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옛 기계와 새 기계의 역할을 거의 뒤바꾸듯이 조정하기로 마음먹고, 새 기계에 사흘간 차근차근 쌓아올렸던 젠투를 과감히 날려버린 후 XP를 깔았습니다. 기계에 XP를 깔자마자 IE를 통해 돌아다녀보았습니다. 옛 기계에도 이미 XP가 깔려있으니 거의 완벽하게 기계 성능을 체감 비교할 수 있을테니까요. IE로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 비교라고도 할 수 없는 기본 테스트 단계였는데, 충격은 이 때부터 슬슬 시작됩니다:
일단, 문서 스트롤이 느립니다. P4 2.8G + 512 MB 기계가 P3 700M + 384 MB 기계보다 (체감 상으로) 대략 열 배 이상 느린겁니다! 스크롤되다가 말다가 하면서 한 번 씩 뭉테기로 뿌려주는 화면 모양새가, 마치 무슨 아웃풋 버퍼를 통해 뿌려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럴/수/가!...라고 하려다가 말고 일단 넘어갔습니다.
Smart Clock이라는 애용품이 있습니다. 윈도용 시계인데 XP에서는 반투명하게 만들어서 쓸 수 있습니다. 옛 기계에서 항상 쓰던 물건이라서2 새 기계에도 얼른 설치하고 반투명하게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헉! :shock: 반투명 모드를 끄면 상관 없는데, 이걸 켜면 시계 아래의 화면이 스크롤을 거의 못하고 버벅대는겁니다. 어느 정도냐하면, 마우스 휠로 문서를 한 단계 쭉~ 스크롤하면, 시계 이외의 나머지 영역들이 목표 화면까지 다 도착할 때까지 시계 아랫 부분은 출발지점 영상이 남아있다가, 스크롤이 끝난 후에야 부랴부랴 삐거덕삐거덕 쫓아가서 나머지 부분과 매치되는겁니다. 아주 심각한 수준이라서, 1년 이상 애용하던 반투명 시계를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cry:
2~3일 정도 이런 상태로 지내다가 작은 결심을 하게됩니다. 어차피 잠시 후면 옛 기계에는 지금 깔려있는 XP 대신 Gentoo(또는 FreeBSD)가 설치되고, 여기에 X를 깔긴 깔지만 거의 SSH 접속만 쓸 예정입니다. 즉, 옛 기계에는 이제 디스플레이 성능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는거죠. X를 깔아두는 것도 혹시 모를 비상 사태를 위한 대비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방금전에 본체 뚜껑을 열고 VGA 카드를 서로 맞바꿔보았습니다. MGA의 별명이 '2D의 지존'인 이유가 혹시 하드웨어적으로 이런 기능을 내장 지원하는게 아닐까 싶어서죠. 컴퓨터를 켜자마자 각각의 드라이버를 종전과 똑같은 상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MGA G400은 MS driver, ATI radeon 7000은 하드웨어 벤더 제공 드라이버)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새 기계에 Smart Clock을 반투명 모드로 띄운 후.... 스크롤!
냐하하하 MGA 만세!!!
물론, 제가 워낙 하드웨어나 드라이버에 대해 문외한이라 전혀 엉뚱한 이유가 있는걸 모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MS driver와 벤더 드라이버의 성능 차이), 어쨌든 새로 장만한 고사양 기계가 좀 더 고사양답게 움직여주는걸 보니 기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서 제 이야기를 마칩니다....라고 하면 정말로 이 글의 주제가 'MGA 만세'가 되겠지만, 위에 보시다시피 이 글의 주제는 MGA 만세가 아니라 '궁합'입니다. 아직 신기한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새 기계가 만족할만한 화면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즈음, 한 켠에는 옛 기계가 울적하게 찌그러져있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하면서 뒷바라지한 보람도 없이 남편이 새장가를 가버린 것도 서러운데, 이놈의 남편쟁이가 자기 신장까지 떼어다가 첩실한테 이식시켜준 꼴이잖습니까? 구박도 이런 구박이 또 없지요. 그래도 저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남편인지라 아주아주 미안한 마음을 품으면서, 쭈삣쭈삣 손을 뻗어 옛 기계에도 SmartClock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스크롤! 물론, 당연히 무지하게 느리리라는 우울한 예상과 함께.... 그런데:
이 건 또 뭐 야 ? :shock:
왜? 왜? 대체 왜 이렇게 빠른거지? 느려야 정상인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관뒀습니다. 왜 안 느려지는지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봐도 될 문제고, 일단 빠르면 저야 좋죠, 뭐. 냐하하하하하하~
지금은 아주아주 만족스러운 상태로 두 기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ATI 카드와 옛 기계의 이 신비로운 상태가 앞으로 Linux 2.6 + XFree86 4.3 + Gnome 2.6에서도 유지될지는 아직 모르므로 김치국부터 마실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혹시 비슷한 경험 없으셔요? 확실히 하드웨어 궁합 문제인지 모르겠더라도 얼추 비슷한 의심을 해봤던 적이 있다든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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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노트북(ATI M1 칩셋입니다)은 색상 설정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제 노트북(ATI M1 칩셋입니다)은 색상 설정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24bit 색상으로 지정하고 반투명 띄우면 화면 전체가 무지 느려지더군요. 16bit 색상으로는 어떤 작업을 해도 슥슥 넘어가고요.
(노트북이니 하드웨어 궁합이니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증상은 비슷한듯 하네요. 원인이 같은건지는 모릅니다!)
24 bit에 반투명이면 당연히 느려지겠지요;
24 bit에 반투명이면
당연히 느려지겠지요;
컴퓨터의 체감 속도는 사실 시피유도 하드도 아닌 vga의 화면 디스플레이
컴퓨터의 체감 속도는 사실 시피유도 하드도 아닌 vga의 화면 디스플레이 속도가 많이 좌우합니다. 눈에 보이는 느낌은 0.01초 단위 정도까지도 잡아내거든요. 사실, 이런 걸 보면 마케팅이나 속도 관련 수치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해보진 않았지만 일반 사용자에게 1Ghz 시피유와 2Ghz 시피유 컴퓨터를 각각 두 대 놓아두고 사용하게 한 다음 주관식으로 두 시피유의 속도 차이 비율이 얼마 정도일 것 같냐.... 물어보면 아마 2:1 이라는 답을 내는 사람이 드물 겁니다. 그런데도 사용자들은 두배 빠르다는 시피유 구입을 위해 두배 이상의 돈을 기꺼이 지불하지요. :)
최근의 vga들은 대부분 3d쪽만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보니 2d 쪽이 등한시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MGA 의 2d 속도가 최근의 Radeon 7000의 체감 속도를 앞서는 것은 의외네요. 어쨌든, 두 vga 모두 2d 화면은 포커스 잘 맞게 무척 잘 뿌려주는 제품들입니다. 제 경우는 따뜻한 색감 때문에 MGA보다는 ATI 제품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I conduct to live,
I live to compose."
--- Gustav Mah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