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며....

누가 저에게 보내준 건데
재미난 것은 아니지만.. 함 읽어보세요..
어떤 시간은 가고 또 어떤 시간은 오는가?
해가 저물어 가는 물빛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지독히 어리
석은 어리둥절함.
가만히 있어도 눈이 시리도록 만들어 주었던 그 옛날의 시간들은 다 어디
로 가 버린 것일까? 나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거리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
인다.]
스무살 무렵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촌에 작은
낚시집이나 하나 열어서 살아가는 꿈. 또는 땡중이나 수도승이 되어 산사
의 목어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꿈. 백두대간 봉우리 하나쯤 잡아서 산장
지기를 하며 늙어가는 꿈. 그때는 그게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가끔 세
상은 나를 성가시게 하고 인연이 없는 여자들은 매몰찬 상처만 남기고 떠
나가지. 스무살 무렵에는 유난히 그런 일이 많은 법이지.
가끔, 자유의사로 마감하는 생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네. 마음 주지 않는
여자를 허망하게 그리워하며 무너져 내린 추운 나라의 음습한 거리를 청바
지에 손을 꽂은 채 헤매기도 했을 것이네. 그럴 때면 하늘은 너무도 청명
하여 새들조차 날아다니지 않지. 스무살 무렵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았
네. 무인도에 함께 가자던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그립고 공주같은 옷을 입
고 다니던 짝궁이 그립기도 하지.
심지어 무던히도 두들겨패던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이 그립기도 하지. 그
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반갑기만 했지.
수화기를 들 때마다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네. 이별을 고하는 전
화,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전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전화들이 앞을 다
투어 달려들었지. 토악질로 범벅된 입영전야. 자아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그런 노래를 부르며 밤새 거리를 헤매며 누군에겐지 모를 발
길질을 해대며 눈물을 뿌려댔어도 그땐 외롭지 않았네. 대가리박고 앞으
로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화장실에서 삼켜버리는 쵸코파이도 기
가 막혔지.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정겹기도 했을 것이네.
스무살 무렵, 세상은 언제나 낯설었지. 사람들은 바삐 떠나가고 또 새로
운 사람들이 찾아오지. 어느날, 술잔을 들고 가슴깊이 묻어두었던 씨앗을
숨죽이며 꺼내 놓는 다음 순간. 자신의 주위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 것
같던 이들의 눈동자를 문뜩 보게 되지. 자신의 얼굴을 지나 알 수 없는
저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을... 언제나 깨달음은 연착된 기차처럼 미안스
러운 얼굴로 찾아오는 법. 술잔을 깊이 삼키며 뒤늦게 알게 되지. 모든 이
들이 언제까지나 똑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수는 없다는 지독히 단순한 사실
을. 어떤 친밀함은 또 어떤 알수 없는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는 믿기 어려
운 사실을.
스무살 무렵. 어떤 여자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지. 인간이 얼마나 바보스러
워질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그런 여자.
그런 여자는 포기할만하면 다가와 은전처럼 말을 흩뿌리고 지나가네. 그래
서 상처는 더 오래도록 곪아가지.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 마음 속에는 두려
움마저 생기네.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누이가 되고 간호교사가 되지.
그런 여자를 만난 가을이면 음악은 소금이 되고 마음은 염전이 되지. 염전
의 물을 퍼내느라 하루종일 수차를 돌리는 세월.
그 세월이 오래면 짜디짠 소금처럼 음악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음악들은
하나둘 상처 위로 내려앉아 감각을 퇴행시키지.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쓰
린 속을 만지며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이젠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그럴 때 둘러본 책장의 책들 위에는 뽀얀 먼지가 앉아
있고 지난 1년간 단 하나의 음반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마음을 아리던 여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으며 지난
며칠간 단 한 통의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지.
이십대가 간 거지.
비록 아직은 이십대의 언저리에 놓여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질적인 이십대
는 서해 낙조처럼 부질없이 스러져갔다는 걸 자신만은 잘 알게 되는 거
지. 무심코 뒤져본 지갑 속에선 옛 친구들의 명함이 비져나오고 그들의 이
름은 거개가 한자로 적혀있곤 하지. 우편함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발신인의
카드들이 들어있기 시작하지. 왜 청첩장에는 부모 이름이 적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없이 백색 아트지로 된 그 종이들을 서랍 속에 밀
어넣게 되지. 문화적 삼십대는 그렇게 시작하네. 사람이 미치도록 그립지
만 막상 만나면 아무도 그립지 않네.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게 되는 것도
그 무렵이네. 밤마다 열쇠로 따고 들어오는 집안의 방한구석. 보일러를 켜
고 이불을 넓게넓게 깔아보아도 어쩐지 스산하기만 하지. 시리즈 비디오
를 빌려보게 되고 반쯤은 다 못보고 반납하게 되고 가끔 혼자서 극장가를
배회하기도 했을 것이네.
그럴 때 한 여자를 만나게 되지. 이제 바보짓은 하지 않아도 좋네. 사람
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허투로 관통시키
지 않기에 이제 다소는 무덤덤하고 심드렁하게 사랑을 고백해보게 되지.
그런 방식이야말로 서로의 상처를 줄이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인
간이 만든 최악의 제도라던 결혼이 차악으로 보이게 되는 것도 그 쯤이고
서로를 간헐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더벅머리 친구보다 지속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반려가 더 나아보이는 때도 그 무렵일 것이네.
스무살 무렵에는 여자의 매력이 마음을 데우지만 이제는 여자의 아픔이 용
기를 북돋게 되지. 스무살의 전장에 묻고 왔다고 믿었던 부장품들이 옷장
속에서 기어나오지. 열정, 질투, 희망 따위. 말없고 단정하던 그녀가 자신
에게만 응석을 부리기 시작하지. 월급을 탄 그녀가 중저가 브랜드의 티셔
츠를 사다주면 그게 쑥스러워 일부러 옷자락을 바지 밖으로 빼어내서 입
고 다니지.
하늘의 빛깔은 여전히 어둡고 앞날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그리 힘들게 느
껴지지는 않게 되지. 무겁기만 한 소설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하네. 멍하니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하지.
그래도 가끔 스무살 무렵을 생각하네. 밤새 술 마시던 골목을 지날 때면,
그때 읽던 책을 책장에서 치울 때면, 가끔 담배를 피워대네. 그땐 그래도
자유로웠다, 고 생각하지. 오, 그때의 그 자유가 얼마나 버거웠는지, 얼마
나 성가셨는지, 얼마나 사람을 환장케했던 지를 생각하면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유를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네.
어느날 자리에서 일어나 면도를 하게 되지. 면도날을 새것으로 갈아끼우
고 그녀가 사다준 면도거품을 정성껏 바르고 뜨거운 물을 세면대에 받아
서 말이네. 그리고는 머리를 깎고 몸에 잘 맞지 않는 이상한 옷을 입고 황
급히 달려가네. 꼭 황급히 달려가야만 하네. 그게 어울리네. 그렇게 달려
가면 거기 그대의 신부가 역시 이상한 옷을 입고 피곤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네를 기다릴 것이네. 그때 잠시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다보면, 무진기행
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를 것이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
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리곤 머리를 세차게 한번 내저은 후 걸어가 신부의 손을 힘주어 잡아야
하네. 서른살 무렵엔 다시 은둔을 꿈꾸지. 그 운둔은 스무살 무렵의 은둔
과는 다른 새로운 은둔일 것이네. 이제 새로운 은둔의 동반자와 함께 조심
스럽게 걸어나가네. 드보르작의 한여름밤의 꿈이 울려퍼지네.
마흔 무렵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쓸 것이네. 서른 무렵에는 누구나 은둔
을 꿈꾸지, 로 시작하는 글 말일세. 당신이 부럽네. 축하하네. 이제 새로
운 세계로 걸어가게.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싸우고 토악질하고 부
둥켜 안고 울기를 바라네. 그래야 마흔이 되어도 이런 글을 다시 쓸 수 있
을 것이네.
행복이란 단어는 이제 자네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당신의 것이네.
Re: 뒤돌아 보며....
권순선 wrote..
행복이란 단어는 이제 자네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당신의 것이네.
좋은 글이네요.
마지막 말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
Re: 전 이제 'ㅂ' 레벨로 갑니다만...
스물 셋 넷 다섯 여섯 --> 모두 'ㅅ'
일곱 여덟 아홉 -> 'ㅂ'
심금을 울리는 글이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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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왜 이렇게 도배를 하지... -_-
Re: 올만에 좋은 글 읽네요...
오랜만에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글이네요...
저녁이 즐거워 집니다.